<신용우 칼럼> 고조선과 진국(辰國; 삼한), 동·북부여, 고구려의 상관관계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제9회)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9-12-10 15:41:48
  • -
  • +
  • 인쇄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제8회까지 살펴보았듯이, 고조선이 서쪽으로는 난하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했던 만주의 지배자이며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나라였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만주에 있던 신조선과 불조선이 멸망하고 난 이후의 만주는 어떤 민족의 생활터전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조상들인 한민족(韓民族)이 아니라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이민족이 생활터전으로 삼고 살았다면 만주의 문화주권은 그 소유권자가 달라지고 따라서 만주의 영토권 역시 그 소유권자에 대한 이론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 바로 고구려의 건국연대다.

 
 기원전 108년에 불조선의 멸망으로 인해서 만주에서는 고조선이 멸망했다는 것은 공인된 학설이다. 또한 불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사군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식민사관에 입각했던 기존의 학설이었다.

 

 만일 기존에 알려졌던 바와 같이 고구려 건국연대가 기원전 37년이라면 기존의 학설이 맞을 수도 있다. 한반도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만주 깊숙이는 한사군이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기된 바와 같이 고구려 건국연대가 기원전 217년이고, 기원전 108년경에 그 영역은 요하 유역에 달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한사군은 요하유역에서 고구려와 마주했을 것이니 기껏해야 불조선의 영역을 지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난하와 요하유역을 차지하는 영역에서 한사군의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주가 한나라의 문화적인 영향, 즉 한족(漢族)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뒤를 이은 우리 한민족이 지속적으로 생활터전으로 삼으며 문화의 꽃을 피워나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의 건국연대와 기원전 108년경의 고구려 영역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연대에 준하여 고구려 건국연대는 기원전 37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931년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190년 전후로 몇 십 년이라는 설을 제기한 이후로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왔다. 고구려 건국연대가 소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설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광개토경평안호태황 능비에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의 17세손으로 되어있는데 역사에서는 12세손으로 표기 된 점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왕들이 무려 5세손이나 삭감된 것으로 고구려 역사를 줄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해는 확실하게 기록이 남아 있으니 초기의 왕 중에서 5세손을 삭감함으로써, 신라 우선주의에 입각해 있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등이 고구려 건국연대를 신라보다 늦게 건국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둘째,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 당나라의 시어사 가언충이 고구려와 당나라의 접전 상황을 시찰한 뒤 당 고종에게 보고하는 말 가운데 있는 ‘불급구백년(不及九百年)’설이다. 이것은 중국의 북송 대에 성립된, 오대 왕부(王溥)가 저술하여 송나라 태조 2년(961년)에 완성한 책 '당회요(唐會要)' 권95 「고구려」에 “고려비기에 전하기를 고려는 1000년을 넘기지 못하고 80 노장에게 멸망한다고 했는데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이다(且臣聞高麗秘記云 不及千年 當有八十老將來滅之 自前漢之高麗氏 即有國土 及今九百年矣 李勣年登八十)”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비기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지만 적의 장수가 자신의 왕에게 보고할 때 한 말로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셋째는 한사군을 설치할 때 현토군에 ‘고구려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현이 정말 고구려에 둔 것인지 아닌지의 진위여부를 떠나 이미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기에 고구려현이라는 지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기에, 한사군이 설치되던 기원전 108년에 고구려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을 제기한 신채호와 임승국, 이기백, 북한의 이지린과 강인숙 등은 구체적인 연도를 제시하기 보다는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이백 여년 정도 소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정도였다.


 그에 반해 북한의 손영종은 1990년 '력사과학' 133호에 기재한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통해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맨 끝 부분의 ‘사론’에 ‘고구려는 진(BC 221∼BC 206)ㆍ한(B.C. 206∼A.D. 220)시대 이후로 중국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라고 지적되어 있다”라고 하며 고구려는 진나라 때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주장했다.

 

 물론 그의 학설에도 ‘불급구백년’설이나 ‘고구려 현’의 존재가 거론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고구려 건국연대의 소급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삭감된 5세에 해당하는 왕들을 찾아내어 그 왕들의 재위연수를 산출해서 더하는 방식으로 소급해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재설정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저작권자ⓒ 경남세계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세계타임즈 구독자 여러분 세계타임즈에서 운영하고 있는 세계타임즈몰 입니다.
※ 세계타임즈몰에서 소사장이 되어서 세계타임즈와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합시다.
※ 구독자 여러분의 후원과 구독이 세계타임즈 지면제작과 방송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세계타임즈 후원 ARS 정기회원가입 : 1877-0362

세계타임즈 계좌후원 하나은행 : 132-910028-40404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 구독자 여러분의 후원과 구독이 세계타임즈 지면제작과 방송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세계타임즈 후원 ARS 정기회원가입 : 1877-0362

세계타임즈 계좌후원 하나은행 : 132-910028-40404

후원하기
조원익 기자 조원익 기자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