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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
백제는 찬란한 아스카문화를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한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그 나라의 혼과 문화가 있다면 다시 부활한다. 한 예로 호수에 백제의 물고기 살고 있다. 하지만 그 호수가 사라져 수백 년이 흘러도 다시 호수가 생기면 그 토양에 맞는 백제의 물고기가 다시 부활한다.
세상이치도 이와 같다. 일본의 천황가문은 아무리 부인하고자 하더라도 그 피와 문화 그리고 혼은 백제의 후손이다. 그래서 천황가문은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에 절하지 않고 숭배하지도 않는다. 오르지 백제의 후손이라고 언급한다.
일본문화의 중심에는 백제의 아스카문화 있다. 그중에서 무술의 기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술은 전쟁과 문화의 교류를 통해 발생하고 전승된다. 어이하든 아무리 일본인들이 일본 기원설을 주장하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또 무슨 유파인 流(류)라 하는 것도 문제점이 있다. 일본유술의 200개 넘는 유파가 있다. 처음 시작은 일반명사와 고유명사로 무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역사가 흐르면서 고유적 측면을 소멸시키고 또 그들은 기술을 간소화 시켜 무명을 탄생시켰다. 이는 무술의 실전성에 멀어지며 자아적 무술 형태로 이어지며 제정형으로 이어지는 틀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정확한 일본 유술의 기원알기 위해 백제계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 번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이광희 총재가 발견한 문서를 제시하고자 한다. 백제가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것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한 멸망 후인 663년이지만 옛 문헌을 보면 이보다 더 오래전에 교류가 있었고 또한 단순한 교류를 뛰어넘어 같이 피를 나눈 씨족이라는 것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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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 씨족족보 新撰姓氏錄 출처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위의 자료는 820년에 만들어진 일본 고대 씨족 족보이다.
오른쪽 페이지에 대원진인(大原眞人)라는 백제계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민달 백제왕의 자손이라고 적혀 있다. 민달(敏達)은 일본의 30代 천황인 비다쯔천황(敏達天皇572~585)을 뜻하는 것이며 백제의 왕족이 일본의 천황이라는 것은 즉 당시 일본이 백제의 분국(分國) 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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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 20권 4쪽 |
「민달천황(敏達天皇 元年) 572년 4월 백제대정궁을 영조하다」
민달천황은 천황에 오르자 바로 고대 한반도의 백제궁과 같은 백제대정궁을 지어 생활했음을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백제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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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撰姓氏錄 : 백제 왕족의 후손들의 씨족 족보 |
백제의 호족(豪族) 들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가 열리면서 수도가 교토로 옮겨지자 천황가(天皇家)와 함께 세력을 더욱 키워가며 일본의 중심이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천황가에서는 백제의 호족들 중에서 주로 며느리를 삼았고 그 중에서 가장 명문가인 후지와라씨(藤原氏) 가문의 여식들이 황후가 되거나 천황의 부인(夫人)이 되었는데 후지와라씨는 민달천황의 후손이다.
또한 백제계의 후지와라 성씨가 내대신(內大臣) 이 되어 지금의 내무부장관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며 근위대장(近衛大將) 즉 현재의 경호실장을 백제계 후지와라씨 중에서 발탁을 해서 기용하는 것을 볼 수 있고 50代 환무천황(桓武天皇) 때는 우대신에 후지와라노 다마로(藤原田麻呂)와 후지와라노 코레키미(藤原是公)를 임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대신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우의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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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政記 일본정기 출처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위의 일본정기 20쪽을 보면 문무천황 원년(文武天皇 元年) 가을 8월에 천황즉위가 있었고 후지와라노 미야코 (藤原宮子)를 부인으로 삼았다. 이는 후지와라 노후히토(藤原不比等)의 여(女) 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후지와라 노후히토는 후지와라 성씨 씨조(氏祖)의 차남이며 이들은 모두 백제후손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 45代 성무천황(聖武天皇)의 자료를 꼽을 수 있는데 밑에 문헌을 보면 성무천황은 문무(文武)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후지와라씨(藤原氏)이며 부인 또한 후지와라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724년 갑자년(甲子年) 춘2월에 즉위를 했고 4월에는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宇合)를 지절대장군(持節大將軍)으로 임명하여 군부를 다스린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지절대장군은 군부의 총지휘관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데 백제계의 천황은 내각은 물론이고 군을 움직이는 사령탑에 백제인을 둠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굳건히 하고자 함이었다. 다음에 계속 연재한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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