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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
무술의 즉, 유술은 전장과 많은 관계점이 존재한다. 살아 남기위한 인간의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됐다. 생존본능의 전제 속에서 만들어진 병법이다. 이 병법을 전장이라는 고리 속에서 인간병기로 진화된 문화이다. 서로 전장을 통해 약점을 보완하고 또 장점을 되살리는 신체적 진화의 작업에서 인류 문화는 더욱 발전됐다.
이러한 인간 병법의 유술이 확산된 곳이 동아시아이다. 그 중에서 한반도는 전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 하기위한 혈투를 벌이고 또 자기 세력의 확장과 지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에 의해 형성되어진 무술이다. 하지만 무술, 즉 유술의 극의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세월의 폭풍에서 변화무쌍하게 변화하여 그 시대에 맞게 진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 전장유술(柔術)의 기원은 약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한반도의 철기시대가 번영을 하면서 자연스레 유술의 기술이 생겨나기 시작을 했고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정착을 하는 시기에 백제의 고급(高級) 장수들에 의해 전해지게 된다.
유독 장수들에 의해 전파(傳播)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직위가 높은 장수가 입는 갑주(甲冑)는 그 무게가 상당했고 많게는 40Kg이 넘게 나가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갑주를 착용한 상태에서 발길질은 적절한 공격법이 아니었으며 거기에 투구까지 쓴 상대 장수를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한다거나 발로 차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이기 못했다.
그러므로 상대를 밀쳐 내거나 던지거나 또는 관절을 꺾는 유술의 신체기법이 발달하게 됐다. 즉 유술의 모든 기술이 유합도의 모체(母體)가 된 것이다. 물론 당시의 무명(武名)은 유합도가 아니며 상박(相搏) 또는 투전(鬪戰)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대 한반도의 여러 곳의 고분(古墳)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술은 백제의 장수들에 의해 전해져 오다가 663년 신라(新羅)가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서 함락을 하게 되고 삼국이 통일이 된다. 이렇게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을 한 백제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정황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으로 건너 간 백제의 장수들인 무사세력(武士勢力)은 일본의 중심이 되어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백제의 유술을 포함한 병법(兵法)이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나가며 지금에까지 이르러 이광희 총재가 한국적 표현으로 유합도로 표기했다. 이광희 총재가 어휘를 표기한 유합도는 고대 한반도의 백제의 유술을 근본으로 내려온 우리의 몸짓이며 당시에 살기위해 전장(戰場)에서 쓰던 실전무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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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총재가 상대가 검으로 치는 것을 팔굽 누르기의 제압을 하는 모습 |
그러나 현 시대(時代)에 있어서는 유합도가 다소 실전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현란한 발차기를 하는 요즘의 격투무술에 비하면 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이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꼽자면 유합도는 먼저 공격을 하지 않는 무술이라서 그럴 것이다. 유합도에는 선제공격이 없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공격이 있어야 나의 움직임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며 음(陰)의 무술이라 사선으로 들어가 급소를 노리기도 하고 상대의 중심을 허물기도 한다. 또한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내재(內在) 되어 있어서 느린 것 같이 보여도 빠르고 물결처럼 부드러우며 때론 거세다. 즉 부드러움 안에서 합(合)의 길을 찾는 것이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유합도이며 유합도가 추구하는 무술이다.
처음에는 유합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음의 무술이고 음양(陰陽)의 조화와 기(氣)의 운용(運用)을 배우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며 준비운동 없이 바로 기공(氣功) 수련으로 들어간다. 준비운동이 필요 없는 이유는 기공을 하게 되면 기혈순환으로 인해 혈관이 확장되고 근육의 이완을 시켜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준비운동으로 대체 가능하며 또한 고도로 집중이 되어 명상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유합도에 있어 명상은 필수이다. 왜냐면 단순한 체술(體術)이나 혹은 호신술과는 다르게 검(劍)의 움직임으로 그 동작이 이루어져 있는데 검의 승부에서 일도양단(一刀兩斷)처럼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어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앞에도 이야기 했지만 유합도는 장수들이 쓰던 무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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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희 총재가 기술을 받아주는 모습인데 검으로 내려칠 때 입신기법으로 상대 중심 흩트리기와 목과 손을 제압하여 상대를 던지는 기술 |
그들의 검의 움직임에 생(生)과 사(死)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움직임 하나 동작 하나에 신중을 기했고 불필요한 요소나 몸짓 그리고 화려한 동작은 오히려 위험을 초래했다. 즉 유합도의 동작은 간결하며 검술(劍術)과 봉술(棒術) 체술(體術)이 하나로 되어 있어 그 어떤 무술보다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다.
또한 음양의 이론이 그대로 무술에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격이 급하고 활동적이며 참을성이 없는 양인(陽人)의 체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유합도 수련을 하게 되는 경우 처음에는 다소 힘들 수도 있지만 꾸준히 계속해서 수련을 한다면 인내력을 기르고 예전보다 좀 더 차분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처럼 유합도는 단순한 격투나 호신술을 뛰어 넘어 내적인 면도 강화되고 이로써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을 두루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무예(武藝)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유합도는 한국에서 이광희 총재가 2008년 3월 일본에서 10년간의 무술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바로 단체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을 했고 2012년 6월에 세계유합도연맹이란 명칭으로 정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국내 여러 무술단체와 MOU 체결 후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같은 해 8월에는 충주 세계무술축제에 초청 받아 시연(試演)을 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유합도를 알리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끝으로 우리 고유의 무술인 유합도는 무형유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문화재로서의 확립을 바탕으로 국내의 저변확대는 물론이고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 오늘도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진감래의 세월을 보내야 하며 이것을 세상 밖으로 재창출하기 위해서는 역사성과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이념과 기법체계 등을 다시 이 시대에 맞게 확립하는 필수불가결한 작업이기에 그 무형의 유산의 보존적 가치가 있는, 크나큰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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