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훈 칼럼> 일본 무술의 기원 한반도! 이광희 총재와 문답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9-08-05 14: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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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대동유술이란 이름은 지금으로부터 약 9백년 전에 武田家의 조상인 新羅三郞 源義光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源義光이라는 武士집안에서 '大東館'으로 불리면서부터 지금의 形態와 脈을 같이 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대동이란 이름은 이것에 근거한다.


  기원설에도 여러 가지 시각차가 있다. 먼저, 義光의 차남인 義淸이 그 다음 가문에서는 武田家로 변천하였다는 기원설이 있다(도미끼 겐지, 1983). 武田家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日本東京國立博物館』 자연의 理氣와 인간의 氣를 터득하여 이것을 合氣라고 했다. 또 집의 폐가에서 거미가 거미줄의 원형으로 곤충을 잡아먹는 동작을 보고 또 인체를 해부해 인체의 구조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술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기원설은 武田家에서 傳來되어 오는 것으로 종가 25대 武田信友의 문인 대동구지조(다이토히사노스께)에게 전래되면서 본인의 성(性)을 취하여 대동유술이라고 했다는 설이다(김정행 외, 1997).


 다음으로 다께다 소오가꾸(武田惣角)가 창시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이유는 대동유술의 문헌이 다께다 소오가꾸(武田惣角)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께다 소오가꾸(武田惣角)의 大東柔術은 新羅三郞 源義光을 시조로 武田家에 전해졌고 본인이 계승자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다께다 소오가꾸(武田惣角)의 스승이 호시나치카노리(사이고 타노모)라는 사실이 다께다 소오가꾸 사후에 일본에서는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호시나치카노리는 그의 양자인 사이고시로와 다께다 소오가꾸에게 기술을 전수하였는데 사이고시로는 대동유술의 정립에 관여하고 다께다 소오가꾸는 대동유술을 어원 용어를 창안하는데 관여했다. 호시가나의 양자인 사이고시로는 日本 講道館의 사대천황 중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기술은 지금도 증명되는데 다께다 소오가꾸의 신체기법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 이유는 가노지고로의 강도관 유도의 재정립방식 형에 의해서 다른 형태로 변모와 다께다 소오가꾸는 한곳에서 정착해서 지도보다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했었기 때문에 도장장소가 일정하지 않아서 관절기법으로 하여 포수(浦手)하는 기법 중심이었다. 그리고 호시가나는 자기의 기술을 대동유술이라고 칭하였는데 그의 신체기법은 백타(白打), 권(拳), 포수(浦手), 취수(冣手), 화술(和術), 소구족(小具足), 기(氣), 요회(腰廻) 등이며 다께다 소오가꾸는 자신의 기술을 더 발전시켜 合氣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을 추리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대동유술의 전래를 밝히고자 한다. 武田信玄(1521-1573) 戰國時代의 무장, 이름은 하루 노부(晴信), 카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쳐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과 가와나카지마의 싸움을 비롯하여 전후11년에 걸쳐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이에야스의 聯合軍을 격파하였으나 이듬해에 병사하였다(학력개발사, 1991, 일한사전).


 그러나 일본에 대동유술에 관한 설은 의견이 분분하다. 도미끼 겐지 교수의 설에서는 대동유술의 성립은 新羅三郞 源義光으로 시작하여 다께다 소오가꾸(武田惣角)에게 전해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 盛平)이 근대에 새롭게 합기도로 창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도미끼 겐지, 1983).


 제일 설득력이 있는 기원설로 한반도에서 보는 시각은 백제시대의 아스카 문화에서 전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점은 일본 황실의 자손이 백제후손이라는 고증문헌에서 상당한 근거를 제시 해주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내용으로 일본이 섬기는 나라의 말은 대동이라고 하고 대동이란 말은 일본보다 큰 나라 곧, 큰 해가 뜨는 나라 백제를 상징한다는 학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광희 총재님 요즘 항간에 합기도 문제가 또다시 거론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요즘 다시 합기계열의 유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한국합기도와 일본 정통 합기도 간의 정통성과 명칭에 관한 문제이며 또 더 나아가서는 대동류의 근원설에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합기도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합기도(合氣道)는 1942년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에 의해 공포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한국 합기도 측에서는 같은 명칭을 고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문가인 입장에서 제가 볼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분명 한국 합기도는 일본 정통합기도와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명칭을 사용하여 스스로가 올무에 메어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상당히 답답합니다.


 태권도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태권도는 초창기에 일본의 오키나와 가라데(沖縄空手道)의 영향을 받아 상당 부분 비슷하나 그렇다고 누구 하나 태권도를 가라데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명칭이 다르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오면서 변모하며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거듭나서 뿌리를 내린다면 명실공히 새로운 무도의 시작이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같은 명칭에 연연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럼 이광희 총재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합기도란 무엇입니까!

 우선 합기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많습니다. 합기도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철학 그리고 특성과 원리 게다가 기술적인 면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광범위합니다. 하지만 최근 합기도가 어느 나라 무술이냐는 것에 대해서 말들이 많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합기도(合氣道)란 명칭을 사용한다면 일본무도가 맞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의해서 일본에서 먼저 사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명(武名)을 바꾸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왜냐면 한국에서 하는 한국형 합기도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오면서 서로 상이(相異)하게 변했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정통 합기도와 같은 무술로 보기에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가치 없는 싸움에 휘말려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무명을 달리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대동유술의 근원설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광희 총재님께 정확하게 묻고 싶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대동류는 북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기타큐슈(北九州)를 본가(本家)로 한 남쪽의 대동유술이 그 시초입니다. 또한 더 깊이 역사를 쫓아 올라가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는데요. 규슈는 자그마한 섬입니다. 무술이 발달할 만한 토대를 갖고 있는 지역이 아니며 외세(外㔟)의 침입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만큼 비중이 있는 지역 또한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663년 나당연합을 한 신라(新羅)의 공격에 의해 백제(百濟)가 멸망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거리가 가까워서가 아니라 당시 백제와 일본은 혈맹국(血盟國) 또는 백제의 분국(分國)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나라의 관계는 친밀했습니다. 때문에 백제는 아무런 주저 없이 곧바로 바다를 건너게 되고 기타규슈에 정착을 해서 무예뿐 아니라 일본이 정식 국가로 형성하기까지 많은 문화를 고스란히 전하게 됩니다.


 역사서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지만 보잘 것 없던 섬 규슈에 고대 한반도의 백제가 정착을 하면서부터 상당한 발전을 하기 시작하며 일본의 중심이 되어 그 역사의 중심이 아스카(安宿)로 이동을 하고 점차 세력이 확장함에 따라 다시 나라(奈良)로까지 옮겨지게 됩니다.


 일본은 아스카시대까지만 해도 기와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없어 백제의 와(瓦) 박사들이 와서 집을 지었고 그 최초의 기와집이 아스카사라는 절입니다. 단지 기와집뿐만 아니라 부족사회에서 고대국가 즉 일본이라는 정식 국가로 발전하기 앞서 백제는 대장장이 금속 기술 토목 기술 방직 기술 그리고 경호 기술까지 모든 문물을 전해주게 되며 이러한 역사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동유술의 본가가 기타규슈라는 것을 앞전의 인터뷰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하고 강조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대동유술의 근원(根源) 이 일본 규슈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 즉 백제인에 의해서 전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광희 총재님 백제가 규슈로 갔다는 것이 확실한 것인가요! 또 근거를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에 가면 663년 8월 27일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 마지막으로 있었던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패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혹시 신라가 뒤쫓아서 계속 공격을 할 것을 염두 해 바로 미즈키(水城)라는 백제식 성벽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 지금도 다자이후의 "미즈키 성" 에 가면 고대 한반도의 백제인이 만들었다고 명확하게 설명을 해 놓은 것을 확인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울 만한 것은 2001년 12월 23일 날 아키히토(明仁) 일본 천황이 자신의 예순여덟 번째 생일날 기자회견에서 천왕 가문에는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고 자신은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것이 [ 속일본 사기 ]에 기록되어 있다며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열도는 이로 인해 발칵 뒤집어졌을 뿐 아니라 본인도 그 시기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기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에서 발견된 백제의 많은 유물과 토기가 있으며 아직도 백제의 후손들이 매년 제(祭)를 지내고 있습니다.


 고대 한반도인에 의해서 대동유술이 전해졌다면 백제보다 약 백 년 전에 먼저 신라(新羅)에 의해 멸망한 가야국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도 일본으로 갔고 신라 또한 고려에 의해 망해서 일본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제가 전했다고 주장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송 박사님 말씀대로 가야가 신라에 의해 망하고 백제보다 백 년 먼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가야는 규슈를 통해 지금의 오사카로 들어가게 되며 규슈에서는 정착을 하지 않습니다. 가야국의 멸망이 562년입니다. 가야는 처음 규슈로 들어왔다가 무역의 최고 중심이 되었던 오사카로 가게 되는데요. 당시 오사카의 항(港)은 외부로 뻗어나가는 가장 큰 항이었으며 지금도 오사카는 일본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이처럼 가야는 오사카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게 되고 그것을 증명해 주는 고분군이 발견이 됐으며 무려 가야 시대의 동일한 방식의 무덤이 60기 정도가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시가현 오츠시(滋賀県 大津市)의 도래인 역사관에 가면 당시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과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高句麗) 의 행적인데요. 고구려는 666년에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많이 불리해지자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투항을 합니다. 이때 고구려의 마지막 왕자인 약광(若光)이 1799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일본 사이타마현의 히다카시(日高市)로 가서 고구려의 도시를 세웁니다. 일본에서 고구려를 [고쿠리] 또는 [고마]라고 부르는데 아직도 히다카시에 가면 고마역이 있고 고마 초등학교가 있고 심지어는 고마 택시도 다니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사이타마에서 그 세력이 강해지고 확장이 되자 바로 위쪽에 있는 군마(群馬)로까지 가서 그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군마( 群馬)라는 지명이 붙은 한자의 뜻을 살펴보면 무리"군" 에 말"마"입니다. 즉 기마민족이었던 고구려가 말들을 대거 이끌고 그 지역에 나타나고부터 군마라고 불리 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규슈(九州) 시코쿠(四國)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이렇게 네 개의 섬 주위로 약 7천여 개의 작은 섬들이 일본을 이루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런 섬나라인 일본에는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철(鐵)과 말(馬)입니다.

 
 중국 위나라의 역사서 중 하나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을 보면 일본에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철과 말이 한반도로부터 유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철기문화가 발달되었던 가야에서 최초로 철이 들어갔고 백제를 포함한 삼국으로부터 말과 모든 문물이 일본에 들어간 것을 유물과 역사적 사료를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위와 같은 것들은 상당히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요. 왜냐면 흔히들 일본을 "사무라이"의 나라 즉 무사(武士)의 나라라고 알고들 있습니다만 아스카시대 이전에는 청동기시대였기 때문에 철로 된 검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야와 고대 한반도의 삼국이 들어가면서 일본에서 철로 된 검을 쓰게 되었고 사무라이의 시초(始初)는 고대 한반도의 무사(武士)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대동유술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대동유술은 단순히 관절을 비틀고 꺾는 호신술적 개념의 맨손 무술이 아닙니다. 대동유술은 전장(戰場)에서 장수가 싸우다 검을 놓쳤을 때 맨손으로 검을 든 상대를 꺾어서 제압하거나 던지는 고급 기술이었고 비록 손에 검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 동작이 검의 움직임과 같기 때문에 검이 없이는 설명을 할 수 없는 무술입니다. 대동유술은 검의 움직임이 그대로 체술(體術)로 이어지며 상대를 제압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대동류 고류유술(大東流 古流柔術)입니다.


 따라서 검이 없던 고대 일본에서 만든 무술이라고 한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가야 그리고 신라나 고구려에 의해 전해졌다면 대동유술의 본가(本家) 가 규슈(九州) 일리가 없고 오사카(大阪) 이거나 또는 동경(東京)을 중심으로 한 관동(關東) 지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보더라도 대동유술은 백제의 장수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전해 준 "고류유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그 역사가 모든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광희 총재와 필자의 문답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대동유술이 아니 다른 일본 유술의 근원은 우리의 뼈아픔 역사 임진왜란 이후인 500년 이내이며 200여개 유파가 되는 것도 시대마다 다시 재정립하고 창안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무예계에 있어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바로가야 하는 것은 민족의 혼과 정신을 살리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일본은 우경화 세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고 동조하거나 역사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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